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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보왕삼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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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향산사
댓글 0건 조회 229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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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보왕삼매론 법문***

오늘은 보왕삼매론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신앙 생활은 끝없는 복습입니다.
우리가 절에 가서 법문을 듣다 보면 대개 비슷비슷한 말씀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예습은 없어요.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지요.
영적인 체험은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복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까지 익혔던 정진은 어제로써 끝나는 겁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보왕삼매론 많이 들었죠?
이제 다시 복습 삼아서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모두 잊으세요.
그건 과거사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음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 합니다.
사바세계가 무슨 뜻입니까. 범어 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인데 사하다트,
사하를 중국말로 옮기다 보니까 사바가 됐는데 이 말을 우리말로 하자면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하는 세상이란 뜻이에요.
참을 인(忍)자, 흙 토(土)자 인토(忍土).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
혹은 '참는 땅'이라는 겁니다. 또는 감인토, 견딜 감(堪), 참을 인(忍)자 즉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참고 견디어 나가는 세상이다,
이런 뜻입니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어요.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세상사는 재미가 없을 거예요.
보왕삼매론은 이런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옛 선사들이 교훈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활의 지혜예요. 또 순경계가 아니고 역경계,
삶의 거스름 속에서 터득하는 생활의 지혜, 자기 관리에 대한 일종의 처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읽고 해설하겠습니다.

첫째,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 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 몸이라는게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로 이뤄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인간의 존재는 반야심경에 나오듯 오온, 즉 색수상행식,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합쳐서 만들어진 유기적 존재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인연이 닿아 이런 형상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또 인연이 다 하면 이게 흩어지고 말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자체가 무상한 거예요. 늘 변하는 겁니다.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생노병사라 하잖아요. 저를 오랜만에 본 신도나 스님들은 '아이구 스님두 이제 많이 늙으셨네요' 합니다. 중이라구 안 늙는 재간이 있습니까?

부처님도 생노병사 하셨는데. 그게 우주의 질서예요. 그러나 영혼에는 생노병사가 없다고 하잖아요. 거죽은 생노병사가 있다지만 알맹이는 생도 없고 노도 없으며, 병도 없고 사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일상적인 우리를 갖고 얘기하는 겁니다. 몸에 어떻게 병이 없을 수 없습니까? 그게 유기체인데. 탈이 나는 거지요.
병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 말고 그 병의 의미를 터득하라는 말예요.
평소에 건강했을 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앓을 때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웃에게 고마움도 느껴야 하고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인간관계는 어떠 했는가,
나는 직장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던가 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겁니다. 병고 자체가 죽을 병이 아니라면
그 병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라는 겁니다. 양약을 삼으라는 말이지요.
사람의 몸은 허망한 유기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있지만 이 다음 순간 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예측할 수 없는 존잽니다.
본래 그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가지고 늘 건강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즉 건강했을 때, 내게 건강이 주어졌을 때 잘 살라는 거예요.
허송세월 말라는 겁니다. 인생을 무가치한 곳에 쏟아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육신의 병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어요. 정신적인 병은 약으로써 다스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허약합니까? 옛날보다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여러 가지 편리한 시설 속에 살고 있는데 체력과 의지는 자꾸 떨어져요.
어떤게 몸에 좋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모두 그 쪽으로 쏠리잖아요?
이렇게 허약합니다. 옛날 농사짓고 살던, 이런 흙에다 뿌리를 내리고 살던 시절에는 흙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흙의 교훈을 몸소 익혔기 때문에
그렇게 허약하지 않았는데 이젠 자꾸 흙으로부터 멀어지니까, 대지로부터 멀어지니까 그렇게 허약해지는 거예요. 생각 자체가 허약해졌어요.
몸이 조금만 어떻다 하면 하루아침에 좌절하잖아요?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옵니다. 업이란 뭡니까? 하루하루 익히는 생활 양식이에요.
생각이라든가 먹는 음식이라든가 생활습관 이것이 건강하게도 만들고 병도 만듭니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옵니다. 보살의 병은 어디에 있는가. 자비심. 유마경에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내가 앓는다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어머니들은 자식이 아플 때 같이 앓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경웁니다.
자식이 밤새 잠 못 자고 앓을 때 같이 앓는 거예요. 그게 어머니예요. 생명의 뿌리니까. 그런데 자식이 앓고 있는데도 한쪽에서 쿨쿨 자고 모른 체 한다면
그건 어머니가 아니에요. 가짜예요. 이게 누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자식이란 것은 모태에서 나온 가지 아닙니까?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라고요. 가지가 앓을 때 뿌리가 앓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오지만 보살 (어머니들이 보살이지요)의 병은
자비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정상적인 경우고 세상이 이렇게 막 돼가다
보니까 자식이 앓는지 마는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헬스클럽 다니고 잘 먹고 지내지 집안 식구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이런 희한한 사람도 더러 있잖아요?

모든 게 선지식이에요. 우리 앞에는,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선지식입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언짢으면 언짢은 대로 우리의 삶에 교훈을 주고 있어요. 좋은 일이라면 본받아야겠지만 좋은 일이 아니 라면 본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순경계가 아닌 역경계에서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처세훈입니다.

둘째,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
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이 세상을 고해라 하잖습니까?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세계란 말은 그런 뜻이 에요.
우리가 어려운 세상, 고해,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쌓여있는 것이죠. 곤란합니다.

어떤 집안을 놓고 보더라도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어떤 개인의 인생도 그렇고. 세상살이에 곤란 없게 되면 사람들이 넘치게 돼요.
잘난 체 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됩니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지 말라는 거예요.
자신의 삶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숙제로 생각해야 해요. 우리 집안의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안 됩니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해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우리 집안에 이런 액난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 저마다 자기 짐을 지고 나오잖아요.
그 짐마다 무겁고 달라요. 누구든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니까요. 그런 근을 지니고 있어요. 그것이 그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집안에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나쁘게만 생각지 마세요.
그 어려움을 통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창의력을, 의지력을 계발하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됩니다.

처음부터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바세계라는 것, 참고 견뎌야 할 세계.
그런데 여기에 묘미가 있어요. 만약 이곳이 극락이나 지옥이라면 아무 재미가 없어요. 극락? 아무 고통도 없다는 거예요. 무슨 생각만 해도 몰려온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볼 때 이상적으로 추구해야 할 세계입니다.
그러나 재미없어요. 또 지옥? 너무 고통스러워서 감내할 수가 없어요.
사바세계는 그 중간이에요. 그러니까 참고 견딜만한 세상이란 것이죠.

셋째, 공부하는 데에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공부라는 것은 꼭 스님이나 신도들이 정진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닙니다.
공부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만 뜻하는게 아니에요.
이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에요. 장애 없는 세상이 어딨습니까?
다 장애가 있단 말예요. 좋아서 사랑한다는 데도 삼각관계니 뭐니 해서 장애가 있잖아요. 다 장애물이 있다니까요. 장애 없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님들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한 평생 세상을 살다보면 무수한 장애물
경주예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 자리에 오면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왔습니까? 그러니까 인생이란 것은 장애물 경주라니까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 장애물이. 해탈이란 뭡니까? 그런 장애물을 넘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진 상태,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상태 이걸 해탈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장애라는 것은 해탈로 이르는 디딤돌이에요. 발판이에요. 그런 장애가 없으면 해탈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모든 게 다 필요한 존재라니까요.
이 우주에는 다 필요한 거예요. 어떤 미생물이 됐든 다 우주에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생겨났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농약으로, 강한 살충제로 죽여 보세요. 그 미생물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지잖아요.

오늘 이 생태계의 변화라든가 환경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게 다 뭡니까?
너무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 자체가 인간들을 감당 못하는 거예요. 그래 여기저기에서 털어 내느라, 재채기하느라고 지진도 일으켰다가 또 여기저기 불도 일으켰다가 그러잖아요.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것처럼 하도 귀찮게 하니까 털어 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거예요. 지구가 뭡니까. 우리가 기대려는 생명의 바탕이예요.
우리만 살고 지나갈 생명의 바탕이 아닙니다. 영원히 존속돼야 할 생명의 바탕입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들어와서 우리가 너무도 지구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써 지금과 같은 여러 가지 이변이 오는 거지요.

장애 없길 바라지 마세요. 장애라는 것은 다 그걸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해탈의 길로 이어진 길목이기 때문에 장애를 거부하지 말고 그걸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번뇌를 보리로 전환하고 생사를 열반으로 전환하고 고뇌를 기쁨으로 전환하라는 거예요.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는 거예요. 장애없인 해탈이 안 됩니다.

넷째, 수행하는 데에 마(魔)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마란 뭡니까? 나쁜 거예요. 잠잠하게 정진하고 싶은데 늘 졸음이 온다거나
또 공연히 망상이 일어난다거나 다 마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하잖아요. 또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한대요. 이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그릇을 키우는, 우리의 기량을 키우는 소식으로 받아들 여야지요. 우리가 어떤 좋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장애물이 생겨요. 그걸 회피해선 안 됩니다. 회피할 수도 없는 거구요.
그걸 딛고 일어섬으로써 새로운 기량, 새로운 의지력, 내가 지금까지 갖추지 못한 새로운 그릇이 마련되는 거예요.
집에서도 그래요. 무슨 사업하려고 하는데 부도직전에 어려운 일이 닥친다거나 또 혼사를 받았는데 엉뚱한 장애가 생긴다거나 누구나 이 사바세계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이라니까요. 그것을 겉으로만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안으로 곰곰이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안에서 새기며 의미 부여를 하라는 거예요. 이것은 단순한 관념유희가 아닙니다.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에요. 이건 삶의 지혜예요.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할 때 이런 옛 성인들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수행하는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서원. 저마다 서원이 있잖아요. 마음속으로 서원이 있어요.
꼭 수도 세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업하는데도 그렇잖아요.
어떤 기업을 경영하는데도 나름대로 서원이 있잖아요.
이 기업을 키워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여하겠다 하는 서원들이 있다고요.
그런데 어떤 장애가 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된다면 언제 내가 그런 서원을 세웠는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 후퇴하고 만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이렇게 옛 성인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다섯째, 일을 계획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모든 일이 너무 쉽게 되면 안 좋아요. 쉽게 이뤄지면 쉽게 무너져요.
공이 들어가야 합니다. 부실 공사라는 게 뭡니까?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너무 쉽게 이뤄졌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어려움이 있어야 해요. 어려움이 없이 자란 아이들, 이 다음에 어려운 일 있으면
그걸 극복 못해요. 그냥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구요. 이게 다 고해라니까요.

사바세계, 참고 견뎌야 할 세계라니까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때그때 면역을 갖춰야 해요. 일이 쉽게 되길 원하지 마세요. 모든 게 차례가 있는 겁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서도 사계절의 질서가 따라야 움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잖아요. 너무 쉽게 풀리길 원하지 마세요. 뜸을 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뜸을 들여야 한다고.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오랜 세월을 두고 성취하라는 거예요. 많은 세월을 두고 기량이 커지고 그런 도량을 감당할 만한 자질이 갖춰지는 거예요. 아직은 내 그릇이 그런 도량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됐는데 만약 거기에 무슨 일이 뜻대로 된다면 교만해지고 안이해 진다구요.

여섯째,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친구란 뭡니까. 또 다른 나예요. 또 다른 내 자신이라고. 친구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마세요. 또 다른 내 분신이라니까요. 그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믿음과 의리, 신의로써 인간 관계가 이뤄져야 하는데 특히 친구 지간은 그래야 해요.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친구지간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인간관계에는 그런 믿음과 의리, 하나 곁들인다면 예절도 들어가야 해요. 친할수록 예절이 갖춰져야 해요. 예절은 뭡니까?
사람의 도리죠. 사람의 품위고. 좋은 인간관계에는 반드시 믿음과 신의, 예절로 이뤄져야 해요. 친구?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에요.
그러니까 유유상종, 끼리끼리 어울리잖아요. 친구지간에 친구를 수단으로써 자기 출세하는데 발판 으로 삼지 말라는 거예요.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인간 관계를 두텁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만큼 살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관계만 남습니다. 내가 잘 산 인생이라면 좋은 관계가 남고 내가 잘못 산 인생이라면 언짢은 관계만 잔뜩 남는 거예요. 관계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거듭거듭 인간형성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친구는 고마운 존재예요. 왜냐하면 나를 그렇게 일깨워주니까.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나를 깨우쳐주니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눠갖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일곱째,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하셨느니라. 묘미가 있는 말이에요.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 라는 거예요.
이게 뜻맞는 사람 들끼리 살아야 하는데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 끼리 어울리라는
게 상당히 갸웃 갸웃해지는데 한 가정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가정에 아무 탈이 없는, 정말 서로 화합하고 화목한 가정이 이 세상에 더러 있겠지요. 많지는 않아요. 다 갈등이 있어요. 집안에 모두 효자만 있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집안 재미없어요. 인생을 모른다구요. 불효가 있기 때문에 효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불효자가 있기 때문에 효의 값을 아는 거예요. 돌담을 쌓는데 똑 같은 돌은 필요가 없습니다. 큰 돌, 작은 돌, 모난 돌, 납작한 돌 다 필요하잖아요.

우리 조직사회, 이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저마다 각기 독특한 개성이 틀린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거예요. 이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하면 돼요.
조화가 깨지면 그건 병든 상태이기 때문에 안 되고 자기 개성을 마음껏 발휘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그거예요. 큰놈은 이런데 작은놈은 이렇더라.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기분 나쁜 겁니다.
다 한 몫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세요.
어디에 내놓든 사람으로서 한 몫을 하면 된다니까요. 모두가 우등생? 말도 아니지.
우등생 아닌 사람이 있으니까 우등생이 있는 거지요.

여덟째,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공덕이란 공적과 덕행이지요. 한마디로 선행이에요. 선행을 베풀 때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결과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과보를 바라면 장삿속이예요. 신앙생활은 공리성을 배제해야 합니다.
계약이 아니에요. 기도할 때, 요즘 수능시험 때문에 다급해진 엄마들 많지요?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합격이 됐든 불합격이 됐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좋은 점수가 나오든 덜 나오든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이에요. 내가 안 할 수 없으니까
간절한 마음에서 기도할 뿐이지 따로 무슨 결과, 결과 갖고 따지지 말라니까요.

기도란 뭡니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할뿐이에요. 결과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면 간절한 메아리가 있게 마련이에요.
그게 우주의 질서입니다.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아홉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행복의 비결은 결코 크고 많은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 현실이 어떻습니까?
그저 입만 벌리면 다들 경제 타령하잖아요. 하루에도 기업체들이 몇 개씩 도산되고.... 그런데 인간 생활이 경제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우리가 너무 지금 그런 일에만 치우치고 있다고요. 세계의 흐름이 그러니까.
그러니까 분에 넘치게 과소비하고 있잖아요. 우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고.

오늘날 경제가 어려운 것은 일찍이 우리 그릇은 만들어놓지 않고 자꾸 욕심껏 뭘 담기만 하려고 했던 과보에요. 오늘의 불황은 우리들 마음이 그만큼 빈약하다는 증거예요. 그릇을 키우려면 눈앞의 이해 관계에 매달리지 말고 덕을 길러야 합니다.

개체를 넘어서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니까요.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해요. 만족할 줄 알면 잘 사는 거예요.
만족할 줄 모르면 늘 갈증 상태죠.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갖고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렇게 됐어요. 늘 갈증 상태예요.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넉넉해져요. 열째,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사필귀정이란 뜻인데 모든 잘잘못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검고 흰 것이 저절로 드러나요. 진실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마치 꽃향기처럼. 그렇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변명하게 되면 거기서 원망하는 마음, 여러 가지 잡음이 생기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지 말라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트이는 것이요,
트임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부처님 께서는 많은 장애 가운데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셨다.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어떤 장애가 부딪칠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마침내는 법왕의 큰 보배까지도 잃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깊이 새겨 생활의 지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결론 삼아서 말씀드리지요.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신이 지닌 생명의 씨앗을 꽃 피울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어요.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고요. 그런데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는 그런 인내가 필요해요. 그래서 참고 견디라는 겁니다. 거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극락도 지옥도 아니라는 거예요. 사바세계. 참고 견딜만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가끔 외우시면서 생활의 지혜로 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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